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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역사기행] 묘(墓)를 살펴본다

2009.09.29 최종수정 2,282



천경석 (온양고등학교 교사 / 아산향토연구회)



 벌초도 끝나가고 추석이 다가온다. 마을에 다니면서 뵙는 분들의 공통적인 걱정 중 하나가 묘소 관리 문제다. 의식이 많이 바뀌어서 요즘은 매장보다 화장이 더 많다고 한다. 납골묘도 많이 생겼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잘 가꿔진 묘소는 공원처럼 보기에도 좋다. 격에 맞지 않고 너무 요란한 묘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산림 훼손이나 환경 문제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나중에 어떻게 해야 되나.


 아산시에도 유명한 묘소가 여러 군데 있다. 이충무공 묘소(사적 제112호, 음봉면 삼거리), 홍가신 선생 묘소(염치읍 대동리), 송악면의 이간 선생 묘소(외암리)와 강주 선생 묘소(궁평리), 홍만조 선생 묘소(배방면 세교리) 등 옛 어른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개화파 김옥균의 유허가 영인면 아산리에 있고, 윤보선 전대통령 묘소가 동천리에 있다. 좀 특이한 인물로는 한명회의 딸(도고면 도산리), 이완용의 아버지(영인면 구성리), 김영삼 전대통령의 장인(송악면 궁평리)의 묘소가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 조상의 묘가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함은 물론이지만 주변에 갔을 때 이런 묘들을 둘러보는 것도 공부가 될 것이다.


 석물 등 묘소의 격식을 알아보기에 가장 적합한 묘는 이충무공 묘소다. 묘 입구에 이르면 먼저 접하는 것이 신도비(神道碑)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인 사람의 사적을 기록해서 묘의 동남쪽에 세웠다. 이충무공 묘소에는 정조대왕이 지은 ‘어제신도비’가 또 있다. 홍가신 선생의 신도비는 바위 위에 세웠고, 강주 선생의 신도비는 적당한 크기에 기품이 있다. 바닥돌인 대좌 위에 비대(비석받침 -거북모양은 ‘귀부’와 방형은 ‘방부’ 등)를 놓는다. 그 위에 비를 세우고 관석(지붕돌 - 용을 새긴 ‘이수’나 지붕모양의 ‘옥개석 또는 가첨석’)을 얹는다. 비의 맨 위에 좀 크고 독특하게 쓴 글씨는 ‘제액’이라 전서체로 쓰기 때문에 ‘전(篆)한다’고 한다. 비문을 짓는 것을 ‘찬(撰)한다’하고 그 중 긴 문장(산문)은 ‘서(序)’, 시처럼 쓴 것(운문)은 ‘명(銘)’이다. 글씨 쓰는 것은 물론 ‘서(書)’라 한다. 새긴 사람은 안 적었다.


 신도(神道)를 따라 묘에 이르면 석물과 봉분이 보인다. 봉분 앞 좌우에 기둥처럼 세운 것은 망주석, 문신 모습은 문인석, 양 모양은 석양, 아이 모습은 동자석, 가운데 석등 모양은 장명등이다. 조선시대에는 1품 이상일 때 장명등을 세웠다. 봉분 바로 앞에 상처럼 생긴 것은 상석(床石)이다. 상석 앞 작은 돌은 향로석이고, 상석 뒤 바닥에 깔린 돌은 혼이 노는 혼유석이다. 상석을 기준으로 긴 돌을 이어 깐 것을 계체석이라 하고 봉분 아래를 두른 것은 호석(둘레돌, 병풍석 등)이다. 봉분 바깥을 두른 담장은 곡장(곡담)이라 하는데 이충무공 묘소는 돌로 쌓았지만 일반적으로는 흙으로 두르고 흔히 ‘활개’라고 한다. 상석의 뒤, 봉분의 앞에 세운 묘비는 묘표 또는 묘갈이며, 옆에 세운 것을 따로 묘비라고 하기도 한다.(모양으로 비와 갈을 구분하기도 한다.) 나중에 옆에 또 세우기도 해서 비가 여럿이 되기도 하니 요즘에는 모두 묘비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옛 것은 그냥 그대로 문화재로, 유적으로 보면 된다. 문제는 우리다. 매장을 할까 화장을 할까. 납골묘를 만들어야 하나? 산골은 좀 서운하지? 봉분을 만들까 평분을 할까. 수목장은 어떨까. 표지석은 어떻게 할까. 국립묘지처럼 하면 어떨까.


 요즘이 과도기인 것 같다. 여러 해가 지나고 나면 대세가 형성될 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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