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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골 관선재-강당사에 가다

2009.06.30 최종수정 2,233

천경석 (온양고등학교 교사 / 아산향토연구회)



  우리 고장 아산시의 여기저기를 다녀보면 문화유산이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6월 말이지만 벌써 한여름으로 접어든 듯한 요즘은 시원한 숲이나 계곡 주변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오늘은 광덕산 자락인 송악면 강당골에 있는 관선재(觀善齋)-강당사(講堂寺)에 가서 우리 고장 전통문화의 깊이를 음미해보자.


조선 후기의 대학자 외암 이간(李柬)



   아산시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 중 한 분을 뵈러 간다. 예안이씨 집안이 송악면 외암리에 자리 잡는 것은 이사종이 1546년에 온양으로 이주한 뒤부터이다. 그 5세손이 대학자 이간(李柬, 1677~1727)이다. 이간은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수암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수암으로부터 추월헌(秋月軒)이라는 호를 받았고 문하의 중심인물인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 된다. 마을 이름을 따서 지은 외암(巍巖)이라는 호가 우리에게 친숙하다.
   학행으로 여러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했고 관직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 조선시대 3대 논쟁 중 하나이자 조선후기 최대의 학문적 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주도하였다. 강문8학사들 간에, 특히 외암과 홍성 남당리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고 이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논점 중 하나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인데 금수(禽獸)도 사람처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외암은 인물성동론을, 남당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했다. 호서(충청도)의 학자들은 대개 남당의 주장에 동조해서 호론(湖論)이라 했고, 외암의 주장은 주로 낙하(洛下-서울․경기지역)의 학자들이 받아들여서 낙론(洛論)이라 했다. 논쟁은 더 넓고 깊어졌다. 외암의 사상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北學論-속칭 중상학파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북학론은 이후 개화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외암 사상의 산실 관선재(觀善齋)
   외암 선생이 살던 곳은 외암리 민속마을에 있는 건재고택 자리이다. 그는 1708년 광덕산 계곡에 관선재(觀善齋)를 짓고 사돈이자 벗인 천서(泉西) 윤혼(尹焜, 1676~1725)과 함께 학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727년에 애석하게도 5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 때(1777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1810년(순조 10)에 다시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와 부조묘(불천지위, 즉 4대 이후에도 계속 제사를 받드는 신위를 모시는 사당)를 명받았다.
  1816년에 지역 유생들이 관선재 뒤에 그와 윤혼을 배향하는 외암서사(巍巖書社)를 세웠으나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관선재는 훼철을 피하기 위해 마곡사에서 불상(관음상)을 모셔 와서 절로 위장(?)했다. 강당사(講堂寺)의 시작이다. 짐작하듯 관선재를 흔히 강당(講堂)이라 했고 골짜기 이름인 강당골이나 마을 이름인 강당리도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교와 불교의 공존



   이곳에 강당사 현판은 없다. ‘작은 용추’ 위에 2002년에 홍예다리(무지개다리)로 만든 용담교를 건너면 추사(秋史)가 쓴 관선재 현판이 걸린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인다.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ㅁ자 형태로 배치된 건물 중 1999년에 새로 지은 남쪽 건물에 문정공 이간과 천서 윤혼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천사(文泉祠)와 외암문집 목판을 보관한 방(외암집판장)이 있다. 밖에서도 보이니 굳이 대문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예의이기도 하다. 대웅전을 새로(1999년) 짓기 전에는 한 건물 안에서, 그리고 지금도 한 공간에서 유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서로 도와가며 함께 지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곳. 그래서 이곳은 더 뜻 깊고 아름다운 곳이다. 외암의 가르침도 사람과 사물의 근본 성품이 같으니 모두 소중하고 함께 존중하며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흥선대원군 당시에는 스님이 아닌 보살님이 강당사를 지켰고 그 뒤 여러 차례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마곡사에서 모셔 온 관음보살상은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주변은 유원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조계종 비구니인 월해(月海), 종민(宗旼) 두 스님이 1995년에 이곳에 오신 뒤부터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많은 고초를 속에 절집과 주변 계곡의 정비를 위해 노력한 결과 오늘의 이 단아한 모습이 갖춰지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2002년에 잘 생기신 석가모니 삼존불상(석가모니불-관음보살-지방보살)을 모셨다. 세 분 모두 목불(木佛)인데, 특히 지장보살상은 대웅전 자리 바로 옆에 있던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의미가 또 남다르다.



  강당골 계곡에 와서 천천히 둘러볼 이런 곳이 있으니 참 좋다. 그 아래 출렁다리 밑의 용추(큰 용추) 주변도 둘러보고 잠시 쉬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일이다. 아, 사족을 달면 이제 계곡에서의 취사나 고성방가는 더 이상 없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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