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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 온양향교에 가다

2009.07.30 최종수정 1,744



 물고기 세 마리를 그린 옛 그림이 있는데‘삼 어도’라 하지 않고‘삼여도(三餘圖)’라 한다. ‘여’는‘여유’할 때의 여(餘)다. 사람들이 시간 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데 비가 오는 날, 눈이 내리는 날, 그리고 어두워진 밤 시간의 세 가지 여유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핑계대 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의 그림이다.



 장 마가 끝나간다. 폭염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런 때 물놀이 외에 공부를 하는 것도 또 다른 피서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오늘은 그래서 온양향교를 둘러본다.


지식과 인성 교육을 함께
 향교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의 공립 중등(중·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 고 조선시대에는 더욱 강화되어‘1읍1교’의 원 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했다.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초등교육은 서 원에서, 고등교육은 성균관에서 이루어졌다. 사 립학교인 서원은 중등·고등 교육이 함께 실시했다.


 향교는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는 목적도 있지만 성리학적 가치관을 지방에 보급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더 크다고 본다. 그래서 옛 교육기관은 학습 외에 선현에 대한 제사를 매 우 중요시 했다. 요즘 말로 하면 단순한 지식 외 에도 철학과 인성교육을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향교 입구에 홍살문과 하마비를 세우는 것은 선 현봉사의‘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아산시는 조선시대에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의 3개 군·현이었으니 아산향교(영인면 아산 리), 신창향교(신창면 읍내리)도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오늘은 온양6동(온주동, 구온양)에 있는 온양향교를 살펴본다.


 온양향교의 정확한 건립 년대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 초기 태종 (1401~1418 재위) 때로 추정한다. 위치도‘읍의 서쪽 1리’라는 기록에 보면 지금의 법곡동 능미 쪽에 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1610년(광해군 2)에 현재 자리에 중건했다는 구전이 있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법에 따라 앞 공간 에서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뒤 공간에 제사를 위 한 사당을 두었다. 정문인 외삼문으로 들어가면 교실에 해당하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를 좌우에 두었다.


 서재 (西齋)는 작년(2008) 말에 짓고 올 봄에 보수공 사를 마무리했다. 명륜당 뒤로 올라 내삼문을 거 쳐 대성전(大成殿)으로 간다. 공자를 배향할 때 호칭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기 때문에 대성전이라 했다.


 공자 등 유교 선현의 제사를 올리는 곳이어서 문묘(文廟)라고 한다. 향교를 문묘 또는 교궁(校宮)이라고도 하는 이유 다. 소설위(小設位)로 중국의 공자와 4성(안자· 증자·자사·맹자) 2현(정호·주희), 동방(우리 나라) 18현(신라-설총·최치원, 고려-안유· 정몽주, 조선-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 조·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 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교생 정원은 50명으로 16세 이상의 사대부와 서민의 자제들이 공부했다. 조선 후기부터 서서 히 쇠퇴하다가 흥선대원군 이후 교육 기능을 상 실하게 된 뒤 지금까지 석전제를 중심으로 하는 선현봉사와 지역 유림들의 결속 기능을 유지하 고 있다.


 방학을 이용하여 충효교실을 운영하기 도 한다. 현재 온양향교의 책임자인 전교는 이흥 복 님에 이어 권태신 님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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