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명예기자] 온양온천은 언제부터 유명했을까?
온양온천은 언제부터 유명했을까?
시민기자 김연광
아산을 대표하는 ‘성웅 이순신 축제’가 최근 성대한 막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아산을 대표하는 온양온천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로 ‘삼국사기’에 ‘끓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란 뜻의 탕정으로 처음 등장한다. 조선시대 온양온천을 처음 찾아온 왕은 태조였다. 1396년 태조는 서울을 떠나 3월 16일 온양에 도착했고 보름간 머문 후 4월 7일에 귀경했다. 이렇듯 온양온천은 그 명성과 효과로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고, 왕의 온천을 위한 여정이 잦아지면서 세종 때 이를 위한 숙소를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온양행궁(온궁)의 시작이다.
행궁은 왕이 본궁 밖에서 임시로 머물기 위한 건축물을 뜻하는데 온궁은 이와 더불어 온천욕에 특화돼 건설했다는 특징이 있다. 왕이 사용하지 않을 시엔 백성들도 사용 가능했으며 왕실의 전용 공간을 제외한 다른 시설 역시 개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기를 거치며 온궁은 크게 손상되었고 장기간 복구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후 온궁은 현종 시기에 복원되어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현종 이후 4대 왕과 그 가족의 온행은 꾸준히 이어졌으며 ‘온양별궁전도’에서는 탕실을 중심으로 여러 시설로 구성된 온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1800년대 문호가 개방되고 일본인 상인들이 온양온천의 상업적 가치에 주목하며 온궁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들은 러일전쟁 중 온궁을 자신들이 매입했다고 주장하며 강제로 탈취했고 이후 시설을 개조해 이듬해 ‘온양 관’이라는 명칭의 온천장을 개장해 관광객을 유치하며 영업을 개시했다. 1926년 이후 온양관은 근대적인 온천여관인 ‘신정관’으로 변경됐고 해방 후 ‘온양철도호텔’로 바뀌었지만 6·25전쟁 중 그 일대가 파괴되었다. 현재는 ‘온양관광호텔’이 과거 온궁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며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